다스다스 2019. 10. 14. 06:44


누구는 말도 안 되는 선수들을 보유하고 관리의 중요성을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이론적으로 이뤄낸 감독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구는 말 그대로 운빨이 많이 따라준 감독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다양하겠지만 저한테는 늘 이상론에 도전하던 멋진 감독으로 기억에 남아있어서 앞으로 그의 커리어가 별 볼 일 없어지더라도 그의 능력을 폄하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마치 오래된 밀란 팬들이 사키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좋은 기억들만 얘기하는 것처럼) 오히려 전 시티 팬들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어요. 어떤 성적을 내느냐보다 해마다 변화하고 달라져가는 팀을 보는 재미는 축구장을 찾아가고 시간 맞춰 컴퓨터나 티비를 켜는 팬들에게 있어서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확신하거든요. 더 나아가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을 거라고 보구요.



요즘은 리버풀이 이런 게 보여서 경기 보는 게 재밌습니다. 딱히 좋아하는 팀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타 팀 경기들 중 제일 많이 보게 되는 팀이랄까. 여전히 바르셀로나가 제일 좋고 그들의 경기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챙겨보려고 노력하지만 축구 내적인 재미 자체는 리버풀이나 시티 같은 팀들을 통해서 느끼는 게 더 커요. 물론 타 팀 경기들은 바르셀로나만큼 집중해서 보지 않아서 리뷰를 할만한 그런 건 없습니다. 집중해서 써도 모자란 부분들이 많은데 대충 보고 쓰면 오히려 방문해주시는 분들의 축구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거든요.




사실 펩이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하던 시기에 펩을 밀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난 그 때 펩을 밀었다 하시는 분들 다 거짓말 하는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음. 현지는 물론이고 꾸코, 그 당시 일반적인 팬덤의 분위기 싹 다 무링요였습니다. 라우드럽까진 이해할 수 있어도 펩은 절대 아니었음. 당시 감독이던 레이카르트야 지역 언론들부터 어떻게든 내보낼라고 혈안이 되어있었으니 남을 거란 생각을 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으셨을 거고. 무링요가 여섯 번 붙은 게 다인데 무슨 책 한 권은 되는 양의 종이 다발 들고 바르셀로나 도시로 왔다고 했을 때 팬들이 기대하던 거 아직도 기억남. 



놀라운 사실은 이미 저러기 한참 전부터 레이카르트의 후임은 펩 과르디올라로 정해진 상태였고 (라포르타, 크루이프, 치키 셋의 합의 하에 이미 펩으로 3월인가 그 때부터 정해져있었다고 나중에 밝혀졌었습니다. 당시 최종 후보 셋은 펩, 라우드럽, 무링요였음. 전반기에는 발베르데랑 한 명 더해서 다섯 명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보드진 중 일부가 무링요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던 터라 얘기는 들어보자고 한 거였다는 게 좀 충격이긴 했죠.



그만큼 팬들 사이에서 철학이고 나발이고 이기고 우승하는 게 엄청 크게 다가왔던 시기고 팀이 망가져가는 게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근데 펩은 부임 후 누만시아 전, 라싱 전을 팬들이 우려한 그대로 보냈고 당연히 무링요 왜 안 데려왔냐는 얘기가 조금씩 나왔고 펩은 그런 우려를 스포르팅 리스본 전을 기점으로 서서히 지우더니 팀은 달라져가기 시작했고 역대급 팀이 슬슬 만들어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08-09 시즌 전반기 계속해서 연승을 달리기 시작할 때 한 기자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선수단에 겉으로 봤을 때 레이카르트의 4-3-3 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데 이렇게 잘하는 이유가 뭔지를 묻자 펩은 레이카르트와의 비교를 피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4-3-3 을 가장한 변형 4-4-2 며 앙리와 메시는 저번 시즌과 전혀 다른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우리가 잘해나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해야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안 되서 아리고 사키는 펩을 한 번 칭찬하더니 그 후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앞장서서 펩을 칭찬하기 시작했죠. 늘 비판적이고 짜게 평가하는 아리고 사키가 펩을 비판한 건 09-10 시즌 인테르와의 챔스 4강 토너먼트 딱 한 번이었음. (제가 지금의 수아레즈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사키는 그 당시 즐라탄을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고...)



크루이프는 누만시아한테 졌을 때부터 펩은 올바른 방향을 알고 있다고 미리 쉴드치고 있었습니다. 다들 초장부터 망했다고 할 때도 이 양반은 걱정하지말라고 했음. 레이카르트 때도 다 쟨 어떤 선수를 쥐어줘도 쓸 줄 모르는 감독이야라고 깔 때 (당시 레이카르트는 중위권 수준의 팀을 맡아서 완전 국밥 한 그릇 뚝딱하듯이 말아먹고 온 감독이었는데 부임 시즌이었던 03-04 시즌 전반기 경기력이 좀 심하긴 했습니다.) 실력이 있는 감독이고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쉴드치기도 했었죠. 실제로 그렇게 됐고.




그렇게 펩은


1년차엔 떨어진 바르셀로나의 모든 면을 다시 원상태 또는 그 이상으로 복구시키며 기초가 되는 것들을 재정립했으며

2년차엔 그 기초가 되는 것들을 바탕으로 이론적으로 이상향에 가장 근접한 포워드 (즐라탄) 를 데리고 한 번 더 전술적 변화를 가져갔으며

3년차엔 그 실패를 재빠르게 받아들이고 실전적으로 이상향에 가장 근접한 메시를 데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을 해내며 또 한 번 전술적 변화를 가져갔으며

4년차엔 기존 선수단에 전 시즌보다 확연하게 기복을 줄여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간 선수들 (세스크, 산체스) 을 데려옴으로서 크루이프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주장하던 전술적 변화 (3-3-1-3) 를 시도했습니다.




이렇게 시즌을 계속 거쳐가면서 변화하는 팀이 최종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론에 근접한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건 그 어떤 재미와도 바꿀 수 없는 부분이라고 보고 전 펩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가면서 덜 우승했어도 정말 좋았을 거에요. 혹여나 08-09 시즌 이후로 단 한 번도 우승을 못했어도 전 좋았을 거임. 트로피의 가치보다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보는 이유를 필드 위에서 가장 잘 보여준 감독이었거든요. 전 발베르데가 온순한 펩 과르디올라란 세간의 평가에 조금이라도 어울리게 공격적인 방향성을 어떻게든 녹여내면서 그 안에서 타협을 하는 감독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를 믿으려고 스스로 합리화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이 블로그를 통해서 방문해주시는 분들에게 설득시키려는 글도 많이 썼을 거고. 근데 그런 감독은 아니었던 거고. 그래서 믿지 말라고 나서서 얘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젠 그 어떤 언론도 발베르데를 놓고 온순한 펩 과르디올라란 얘기는 안 하죠.



시티 경기를 요즘은 시간대가 맞으면 보고 안 맞으면 안 보는데 펩 정도의 감독에게 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 팀에서의 챔스 우승은 그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더 올라서는데 분명 필요한 부분인데 꼭 안 해도 된다고 봅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그러지 않아도 펩이 또 다른 팀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팀들은 어필하려고 쌩쑈를 할 겁니다. 특히 첼시나 맨유나 아니면 이탈리아 팀들이나.



리버풀 팬들이 클롭을 좋아하는 것도 그가 있음으로 인해서 1분이라도 더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 더 클 거라고 봐요. 단순히 우승을 해주고 그런 것보다도요. 그가 매 시즌 팀을 바꿔나가면서 더 재밌어지는 게 보이잖아요? 그만큼 그의 밑에서 재능을 터뜨리면서 성장하는 선수들도 보이고.



바르셀로나도 메시가 떠나는 시기가 오면 이런 감독이 더 필요할 겁니다. 피구를 잃으면서 바르셀로나가 나락으로 갔던 건 단순히 피구란 선수를 대체할만한 선수를 못 구했기 때문이 아니었음. 그런 과도기를 능력으로 메꿀 수 있는 감독이 없었던 것도 되게 컸어요. 당시 반 할의 후임으로 왔던 페레르는 지금의 발베르데처럼 중위권에서 이제 막 올라오던 감독이었고 그런 중압감을 바르셀로나의 관념을 만족시키면서 이겨낼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음. 메시가 떠나는 시기가 올 때도 그런 감독이 한 번쯤은 와야 큰 위기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에요. 위대한 선수들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위대한 감독의 필요성이랄까. 그게 챠비가 된다면 정말 이상적이겠지만 챠비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한 명쯤은 보였으면 좋겠네요. 루쵸 이후로 필살기가 될 것 같은 감독으로 꼽았던 게 코쿠였는데 굉장히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음. 데 부어도 마찬가지고.



챠비의 현재 행보는 딱 메시 이후의 바르셀로나를 맡는 흐름인데 어떨 지 지켜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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