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tball/Writing

왜 위대한 팀들은 종말을 고하는 것일까?

다스다스 2012. 12. 15. 17:06

Guardian 에 칼럼을 기고하시는 Jonathan Wilson 씨의 The Question 칼럼입니다. 2012년 5월 2일에 올라온 칼럼이라 좀 오래됐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거와 상관없이 읽다가 내용이 굉장히 흥미로워서 번역해봤네요. 사실 집에 오니 할 게 없기도 했고..

 

의역은 어느 정도 감수하고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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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우리의 죽음이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일깨워준다. 주목을 받는 햇병아리 유망주에서부터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백전노장이 되기까지는 서서히 시간을 거쳐가며 이뤄진다. 축구에서의 시간은 실제 인생에서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며, 이것은 위대한 선수들이 남긴 업적들보다 더 위대한 사실이다. 그들은 떠오르고, 깜빡이고, 빛나고, 무언갈 쟁취해내며, 서서히 사라져간다. 이러한 흐름은 현대에 접어들면서 더더욱 가속화 되어가고 있고, 역사적인 흥미가 덜해지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펩 과르디올라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과르디올라의 팀은 전 세계 사람들이 감탄하게 만들만큼 뛰어난 축구를 보여줬고, 경기를 지배하며, 상대 팀들을 박살내버렸다. 3년차를 마무리 하며 그가 들어올린 트로피의 개수는 10개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에선 즐거움이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확실히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라는 걱정에 휩싸여있는 듯한 표정이었으며, 바르셀로나의 레벨을 유지해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 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과르디올라의 걱정이 단순한 나의 추측이 아니란 것은 그의 머리가 감독 부임 했을 때 당시와는 정반대로 달라진 것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축구계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3년차는 가장 중대한 시즌이다. 3년차는 성공이 아닌 실패를 부른다." (헝가리 출신의 감독 벨라 구트만이 남긴 말이다. 그는 4-2-4를 남미에 전파한 감독으로 알려져있으며, 공격적인 방향성의 축구를 추구하던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르셀로나의 첫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다. 그는 벤피카를 이끌고 2연속 유러피언 컵 우승을 이끌어냈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나 강한 압박을 구사하는 팀들에게는 더더욱 잘 적용되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3년차는 위대한 팀들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 같은 것은 축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팀들이 종말을 고하게 됐던 이유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이 존재한다.

 

 

이 세상의 영광은 이처럼 사라져간다.

 

가장 큰 문제이자 첫 번째 이유는, 당연한 것이지만 선수들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5연속 유러피언 컵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우승을 차지했었던 위대한 레알 마드리드는 선수들의 노쇠화로 인해 끝을 맞이하게 된다. (마드리드는 5연속 우승을 하는 동안 두 번의 감독 교체가 있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구트만의 3년차 법칙을 피해갈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마드리드의 6연속 결승 진출을 막은 팀은 다름 아닌 바르셀로나였다. 물론 4강이 아닌 8강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레알 마드리드가 유럽 최고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비록 부였지만 마드리드가 아닌 다른 몇몇 클럽들도 그러한 재정적인 여유를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는 소리다. 마드리드는 더 이상 유럽의 챔피언은 아니었지만 60-61 시즌부터 64-65 시즌까지 5연속 라 리가 우승을 해내며 영광의 시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1966년에 유러피언 컵 정상에 다시 한 번 오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후 마드리드는 32년 동안 빅이어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37살의 페렌크 푸스카스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를 상대로 했던 1964년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호세 산타마리아는 34살이었고, 파코 헨토도 31살이었다.

 

돈 레비는 브라이언 클러프와 지미 암필드를 위해서 그리고 리즈를 위해 1974년에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팀을 떠나게 된다. 리즈에 가려져 빛을 못보던 리버풀의 빌 샹클리 감독 또한 같은 시기에 팀을 떠나는데 그는 리버풀을 떠나기 전에 그의 평생의 클럽인 리버풀이 위대한 팀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고 새로운 지휘자에게 모든 걸 맡기고 떠났다. 다시 돌아와 오랜 기간동안 변화와 리빌딩을 해낼 수 있는 감독은 밥 페이즐리, 알렉스 퍼거슨 그리고 발레리 로바노프스키와 같은 오래된 경력을 가지고 있고, 한 클럽에서 오랜 시간동안 머문 감독들에게만 있는 능력처럼 보였다. 하지만 1964년에는 그러한 감독이 없었다. 팀이 무너져가는 이유는 단순히 핵심 선수들이 늙어가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드리드는 분명 늙은 팀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시대에 뒤떨어진 팀이었다. 전술의 역사는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인테르의 맨 마킹 시스템은 마드리드의 핵심 선수들이었던 푸스카스와 헨토를 질식시켰고, 레알 마드리드를 패배로 몰아갔다.

 

 

 

사건이다. 친애하는 소년이여, 사건

 

때로는 외부적인 사건들이 개입해 문제를 일으킨다. 빅토르 마슬로프 지휘 아래에서 디나모 키예프는 세 번의 소비에트 챔피언쉽 리그를 연속으로 우승했었다. 문제는 그런 빅토르 마슬로프 감독에게 소련은 1966년 월드컵을 앞두고 디나모 키예프의 1군 선수들과 유스 선수들을 가르쳐서 월드컵에 나갈 것을 강요했다. (실제로 소련은 월드컵 기간동안 리그를 중단했었다.) 그는 끝내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고, 모스크바에서 다시금 키예프로 돌아왔다. 마슬로프는 1970년에도 똑같은 것을 행했는데 1966년보다 더 안 좋은 결과를 도출해내었다. (더 안 좋은 결과를 낸 이유는 명확했다. 유스 선수들 중 1966년의 세대만큼의 재능을 갖춘 선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좀 더 비극적인 사건은, 1991년의 세르비아 리그의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내전으로 인해 아무런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팀이 공중분해 되어버렸었다.

 

90년대 초반의 리버풀 또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백패스 금지 규정의 도입은 리버풀이 당시에 행하고 있었던 골키퍼에게 백패스로 공을 전달해 안정적으로 볼 소유권을 유지하며 경기를 지배하던 그들의 스타일을 바꿔야만 했던 것을 의미했다. 리버풀과 비슷한 방식으로 축구를 하던 노팅엄 포레스트는 백패스 금지 규정이 도입된 첫 시즌에 강등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내며 2부리그로 떨어졌다. (백패스 금지 규정이란 같은 팀 선수가 골키퍼에게 발로 전달하는 패스를 골키퍼가 손으로 잡아낼 수 없는 규정을 말한다.) 노팅엄 포레스트가 그러한 최악의 결과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늙은 브라이언 클러프는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따라갈만한 능력이 없었던 게 가장 컸다. 프리미어 리그의 새로운 환경은 또 다른 상업성과 가능성 그리고 리버풀이 조만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뒤쳐질 거라는 약간의 의심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만약에 힐스브로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슬픔과 분노에 잠기는 일이 없었을테고, 케니 달글리쉬가 떠나지도 않았을 거다. 리버풀은 이러한 변화에 앞서서 좀 더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거다.

 

사건과 비극은 위대한 팀들의 종말을 고하게 만든다. 소름이 끼칠만큼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보자면 토리노의 수페르가 비극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뮌헨 참사 같은 경우를 얘기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던 거지만, 이러한 것들은 매우 특수한 경우들이다. 위대한 팀들이, 특히나 명확하고 극단적으로 하나의 철학을 쫒는 팀들이 내려오게 되는 일반적인 경우는 선수들이 늙어가는 것이나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바로 본인 스스로들이 핵심을 놓치고 변해갔기 때문이다.

 

 

 

자기 희생의 부정적인 말로

 

1967년 4월,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해서 리그에서 승점 4점이나 앞서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러피언 컵 8강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어내며 4강행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상황들이 틀어졌다. 4강에서 CSKA 소피아와 두 번의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승부를 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를 치뤄야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당시 인테르는 볼로냐에서 경기를 여는 것을 조건으로 CSKA 소피아에게 4분의 3의 입장료를 지불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리고 결국 인테르는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결승행 티켓을 따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수비적인 방식에 의문을 표했고, 상대팀의 방식으로 경기가 흘러가지 않게끔 하는데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는 그들의 철학이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한 의문들은 곧 결과로 나타났다. 인테르는 라치오와 칼리아리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두고, 유벤투스에게 1-0으로 패배했다. 연이은 무승부와 패배로 유벤투스와의 승점차는 2점차로 줄어들었다. 2점차로 줄어들어버린 상황에서도 나폴리와 비겨버렸다. 하지만 유베는 만토바에서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피오렌티나와의 홈 경기에서도 비겼고, 유베는 비첸자를 꺾으며 승점차를 좁혔다. 인테르는 시즌을 마무리 하기까지 단 2경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열릴 셀틱과의 유러피언 컵 결승, 만토바와의 리그 원정 경기) 이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면 또 다른 더블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든 의문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이러한 부담감은 인테르를 더더욱 조여왔다.

 

인테르의 보드진들은 레알 마드리드가 엘레니오 에레라를 노린다는 것에 불안해했으며, 산드로 마졸라가 플루로 한 동안 고생하더니 이번엔 루이스 수아레즈가 허벅지 부상을 당해버렸다. 상황이 계속 이렇게 돌아가자 가족과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모든 것들로부터 선수들을 떨어뜨리고 강제로 투숙시켰다. 상황을 나아지게 하려는 선택이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압박감은 분위기를 조성시킬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어디로도 갈 수 없었죠." 라이트백 타르치시오 부르니치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우리가 큰 부분에서 무너진 채 경기를 뛰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러피언 컵 결승전과 리그 마지막 경기 둘 다 말이죠."

 

리스본에서는 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인테르는 도시에서 30분 가량 떨어져있는 해안 거리 근처의 호텔에서 결승전을 준비했었다. "우리의 버스가 호텔 문을 통과한 그 순간부터 3일동안 저희는 경기장은 커녕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3일동안 코칭 스태프와 호텔 직원들을 제외하면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부르니치가 계속해서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아마 돌아버릴 겁니다. 에레라의 밑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여러 차례 겪으며 적응해내갔지만, 계속해서 이러한 상황을 겪다보니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어깨에 세계의 무게만한 것을 짊어지고 있었고, 그러한 것을 풀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죠. 저를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말이죠. 세 시간 정도 잘 수 있다면 그 날은 땡 잡았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선수들이 결승전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지아친토) 파체티와 저는 늦은 밤까지 깨어있었고, 우리의 주장이었던 아르만도 피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긴장감에 구토를 할 정도였어요. 사실, 네 명의 선수들이 결승전 당일날 아침 구토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은 경기장에 나가기 전 드레싱 룸에서 구토를 했죠. 이런 면에서 보자면 저희는 스스로 자멸했다고 볼 수 있었죠."

 

결승전에서 셀틱의 쏟아지는 공격에 인테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녹초가 되버렸다. 피지컬적인 것만큼 감정적인 부분도, 정신적인 부분도 말이다. 인테르는 이른 시간에 패널티 킥을 얻어내 성공시키며 우위를 점했었지만 셀틱의 이어지는 맹공에 2골을 내리내주며 2-1로 패배하며 준우승으로 마감했다. 이어졌던 리그의 마지막 경기에서 유벤투스는 라치오를 잡아내며 승리를 차지했다. 인테르의 골키퍼 지울리아노 사르티는 베니아미노 디 지아코모 (지아코모는 전 인테르 선수였다.) 에게 단 한 번의 슈팅을 허용했는데 그게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만토바가 1-0으로 승리를 차지하며 경기가 마무리 되었다. 유러피언 컵을 놓쳤던 인테르는 그렇게 스쿠데토도 놓쳤다. 그들을 위대한 팀으로 만들었던 집중력과 규율 그리고 조심성은 끝내 그들을 잡아먹고야 말았다.

 

 

 

썩어가는 열매, 시들어가는 꽃

 

위의 인테르의 얘기와는 정반대로 종말을 고했던 팀의 얘기라고 볼 수 있겠다. 바로 1970년대 아약스의 얘기다. 셀틱은 전원 공격이 전원 수비를 넘어설 수 있음을 유러피언 컵 우승을 통해 증명해내었고, 이는 아약스의 토탈풋볼을 이끌어내는 데에 선구자 역할을 해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공격적인 방향성을 가진 시스템이 최선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고도 할 수 있었다. 1972년과 1973년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이 이러한 모습들을 잘 보여준다. 아약스는 두 번의 결승에서 카테나치오를 신봉하는 두 이탈리아 클럽들을 상대로 해서 우승을 차지했었는데 아약스는 두 경기에서 모두 완벽하게 볼을 소유해내며 자신들의 골문을 지키고, 상대방의 골문을 공략했다. 또한 1972년과 1973년의 아약스의 감독은 미헬스가 아닌 코바치였는데 그가 이끌던 아약스는 미헬스가 이끌던 아약스보다 좀 더 자유로운 축구를 구사했었다. 미헬스는 아래에도 나오겠지만 1971년 유러피언 컵 우승 이후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간다.

 

66-67 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아약스는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처참하게 패배를 하며 떨어진다. 미헬스는 그 경기 후 수비진을 새롭게 리빌딩 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파르티잔에서 전투적인 리베로로 유명했던 벨리보르 바소비치를 영입한다. 바소비치는 아약스에게 '단단함과 규율 그리고 위닝 멘탈리티' 를 더해줬다. 하지만 바소비치는 31살의 이른 나이에 천식으로 인해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그는 1971년 유러피언 컵 우승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끝낸다. 같은 시각 미헬스 또한 바르셀로나로 떠나버린다.

 

바소비치의 빈 자리는 조금 더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호르스트 블란켄부르그가 메웠다. 그리고 미헬스의 빈자리는 루마니아의 감독인 스테판 코바치가 대신 했다. 코바치는 팀의 지휘봉을 잡은 후 아약스를 의론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아약스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팀으로 만들었다. "코바치는 좋은 감독이었습니다." 게리 뮈렌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친절했어요. 미헬스는 좀 더 프로페셔녈했습니다. 매우 엄격했고, 모두를 같은 선상에 놓고 똑같이 대우했었어요. 저희는 코바치 아래에서 함께한 첫 시즌에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이전보다 자유로웠습니다. 하지만 규율이 사라지자 저희는 똑같은 스피릿을 재현해내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코바치와 계속해서 함께 했더라면, 유럽 챔피언의 자리를 계속해서 지켜낼 수 있었을 겁니다." (코바치가 떠난 후 아약스에게는 코바치 시절에 비해 너무나도 과도한 자유가 주어졌다고 한다. 선수들끼리 불화도 발생하기 시작했었다. 크루이프가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온 시기도 이 때였다.)

 

인테르가 끝내 무너진 이유가 너무나도 강요된 시스템이었다면, 아약스는 너무나도 자유로운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두 사례를 보면 감독의 일이란 정원 가꾸기와도 같다. 열매는 즙이 많아지면서 점점 단 맛을 낸다. 꽃들은 가면 갈수록 향기가 강해진다. 썩어가는 단계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감독이 해야할 일은 명확하다. 꽃이 시들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향기로움을 뿜을 수 있도록 태양으로부터 가능한 보호하는 것이다.

 

 

 

깜노우에서의 오이디푸스

 

펩 과르디올라에 관하여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그가 구트만의 3년차 법척의 위험성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그리스의 비극과도 같아보였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영웅은 그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12 몽키즈에서 그의 운명을 피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노력하였던 제임스 콜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했던 캐릭터) 과도 같았다.) 과르디올라는 공격의 다양성을 위해 트레블을 이룬 후 에투라는 트레블에 큰 공헌을 했던 선수를 내치고 즐라탄을 영입했다. 하지만 이브라히모비치는 바르셀로나에 적응하지 못했다. 한 시즌만에 그를 되팔아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브라히모비치의 성격이 스쿼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아리고 사키가 이끌던 밀란에서도 자존심이 모든 것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했었다. 계속해서 반복하던 현상은 읽히기 시작했고, 끝내 사키의 사임이라는 결말로 이어졌다.

 

그래서 과르디올라는 선수단의 변화가 아닌 전술의 변화를 통해 흐름을 바꿔나가기 위해 쓰리백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2011년 12월 바르셀로나가 베르나베우에서 마드리드를 3-1로 압도적으로 꺾었을 때, 과르디올라의 쓰리백 실험은 성공적으로 먹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심이 존재했다. 과르디올라의 쓰리백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운명을 뒤바꾸려고 시도했던 것은 오히려 자신을 더 옭아맸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싸를 상대로 해서 계속해서 극단적으로 수비 라인을 내려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팀들을 어떻게 공략할 지에 관하여 항상 고민했다. 그리고 바르싸가 어떻게 하면 예측 불가의 팀이 될 수 있을까? 에 관해서도 항상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좀 더 많은 숫자의 선수들을 전방에다 세우는 방안을 계획해내었다. 특히 다니 알베스가 측면 수비수로서의 역할에서 거의 벗어나 사실상 윙이나 다름 없는 움직임을 가져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것이 바르셀로나를 더더욱 예측하기 쉬운 팀으로 만들었다. 오히려 포위하기 더 쉬워지면서 선수들은 수비벽에 고립되어 둘러쌓이는 경우가 더더욱 많아졌으며, 바르셀로나는 수비벽을 뚫어내지 못했다.

 

이 단 하나의 이유가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가 왜 마지막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에서 그렇게 무너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가 왜 더 이상 지난 세 시즌처럼 속도를 낼 수 없는지에 관해서만큼은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모든 선수들이 볼의 지점과 상관없이 이미 박스 근처에 가있었다. 속도를 내기에는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 때까지는, 명확하게도 마지막을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과르디올라가 운명론적 이상주의를 택할 지 택하지 않을 지 궁금했을 것이다. 과르디올라는 그의 바르싸가 그 어떤 감독의 바르싸보다 더 바르싸다운 팀이 되어야한다고 결정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말이다. 특히나 그의 바르싸가 붕괴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도 말이다. 그는 계속해서 수비수를 줄여나가고 공격수를 늘려나갔다. (어떤 때에는 피라미드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문학적 비유로서 과르디올라의 바르싸를 살펴본다면 오이디푸스의 비극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그가 들은 한 예언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듣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관하여 확실하게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어린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욕구 때문이 아니라 자아를 가져온 '전적인 우연' 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스피노자의 'causa sui.' 에 따르면 베커의 이타주의적인 영웅-이상은 삶의 끝에서 자아를 위해 통제하는 길이며, 오이디푸스의 갈망은 시작에 서기 위함, 즉 자아가 되기 위함이다. 아버지가 아닌 자기자신말이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싸가 오랜 시간 영광에 머물러있기를 누구보다 원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피할 수 없는 흐름을 늦춰나가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했다. 바르싸를 더 위대하게 만든 것은 더 크게 만들었고, 볼 포제션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늘려나갔으며, 선수들을 더더욱 전진시켰다. 과르디올라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실패는 과르디올라의 임기 내에 끝났다.

 

우리는 위의 사례들을 통해 분명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게 됐다. 노팅엄 포레스트가 1980년 마드리드에서 함부르크를 상대로 유러피언 컵 우승을 차지하며 2연속 우승을 거뒀을 때, 이미 그들의 종말의 시작은 발아하고 있었다. 영광은 종말의 시작으로부터 찾아온다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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