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톱에 관한 질문도 있었고 요즘 데 리흐트로 시끄럽지만 바르셀로나는 늘 포워드 영입으로 시끌벅적 했던 팀이니까 어차피 메시를 데리고 메시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 달리기로 결정한 바르셀로나를 보고 할만한 얘기기도 하고.
우리가 말하는 펄스 나인이나 제로톱이라는 게 사실 굉장히 애매모호한데 지금의 바르셀로나만 봐도 메시가 우리가 한창 알던 그 시절의 메시하고는 다르게 뛰고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포지션을 구분하기가 굉장히 애매모호합니다. 누구는 메시를 공미라고 하던데 평생 축구 보면서 이렇게 오른쪽 하프 스페이스라는 애매한 지점에 머물면서 뛰는 선수는 메시말고는 본 적이 없음. 이런 공미가 있었다면 분명 메시보다 훨씬 못하는 선수였을 텐데 제가 감독이라면 1경기 쓰고 벤치가 아니라 관중석에 쳐박았을 지도 모름.
아무튼 이런 메시의 영향을 받아서 뛰고 있는 수아레즈도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넘버 나인이라기엔 굉장히 애매모호하잖아요. 그래서 어찌보면 그리즈만이나 바르셀로나 시절 산체스 같은 특이한 유형의 선수가 지금 바르셀로나에 무지하게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걸수도 있겠죠. 혹자들은 지금 바르셀로나도 기존하고는 다르지만 여전히 메시 제로톱이라고 하던데 그거 역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소리라고 보는 편.
근데 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메시 제로톱이 안 된다고들 말하잖아요? 전 그 얘기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음. 저 위에 말한 걸 증명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냥 제 생각을 말하려는 건데 어느 팀이건 상대가 준비해오는 대응책이 점점 강해질 때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쉬운 해답은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누군가나 일부를 지독하게 믿어서 그 (그들을) 를 중심으로 필살 전술이나 기본 전술을 짜서 순간 변형을 주거나 또 다른 하나는 필드 플레이어 10명이 종횡으로나 좌우로나 동시에 간격을 맞추고 대형을 깨지 않게 하면서 최대한 많이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게 제일 좋습니다. 당연히 전자는 몇몇 팀들만 할 수 있는 거고 후자는 누구나 좋은 훈련을 반복해서 팀을 만들면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두 줄 수비라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된 거고.
토탈 풋볼이란 건 거창해보여도 의외로 별 게 아님. 실전적으로 적용하는 게 힘들고 필드 위에 '완벽하게' 구현되는 게 힘들 뿐이지. 명제 자체는 아주 간단함. '모두가 공격에 가담하고, 수비에 가담한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 돌풍을 일으키는 팀들을 보면 경기당 115~120km 를 뛰고 있습니다. 이 에너지 레벨이라는 게 말하는 게 무엇이냐면 현대 축구라는 건 모두가 같이 움직여야한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사실 제가 별 거 없는 팀에 감독으로 부임한다고 가정해도 일단 많이 뛰자라고 제안할 걸요? 클롭이 괜히 자전거 타러 가자고 하는 게 아니고 루쵸가 B팀 감독으로 있을 때 집에서 잘 쉬고 있는 애들 불러다가 등산하자고 했던 게 아님.
결국 바르셀로나의 메시 제로톱이 등장한 배경을 보면
과거에 다르게 하프 라인 아래에서 볼을 핵심적으로 내보내는 빈도 수를 줄일 필요가 있었고 (롱패스나 센터백의 대각선 롱패스가 많아지면 그만큼 전방에 있는 선수들의 개인 능력에 의해서 기복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 그럴려면 최대한 하프 라인을 넘어선 지점에서 볼을 띄우거나 (크로스) 발로 볼을 굴리는 틀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하프 라인을 넘어선 지점에서 볼을 소유하고 지배력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는 게 첫째.
그럼 이 상황에서 개개인의 기술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지공을 하든 공수 전환의 비중을 최소한으로 줄여 빨리 볼을 되찾아와서 단거리 역습을 나가든 대형과 간격을 어느 지역에서든 깨지지 않고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전원이 동시에 전진을 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야한다는 게 둘째. (아리고 사키는 그래서 좁은 방을 만들어 훈련을 시키거나 훈련 프로그램을 짜내서 미니 게임을 하거나 밧줄로 선수들을 묶어서 훈련을 시켰음. 90년대에 축구 감독을 하던 심지어 프로 선수 출신도 아닌 이론가에 불과하던 양반이. 그러니까 대단한 사람이란 거)
이게 되려면 일단 하프 라인을 넘어선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볼을 소유할 수 있는 포워드가 필요한데 이 선수는 볼의 흐름을 이해하고 패스는 물론이고 좌우 밸런스와 양 측면을 지원해줄 수 있는 선수여야 한다는 점. 근데 바르셀로나에는? 이거 이상을 할 수 있는 메시라는 선수가 있다.
메시가 다시 제로톱으로 돌아가면 맨날 센터백 2명과 피보테 2명에게 둘러쌓여서 경합만 하는 그림을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로톱은 그런 게 아님. 토티나 맨유 시절 호날두, 루니, 제니트의 다니, 아스날의 아르샤빈, 세스크, 산체스, 아자르 등 같은 선수들이 제로톱에 일시적으로든 시즌 내내 서든 그랬던 것도 아니고 메시는 단지 그게 가능했던 선수였는데 그걸 90분을 해도 결국엔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잘했으니까 그렇게 쓴 거고. 지금 메시 제로톱을 쓴다면 당연히 옛날 메시처럼 안 쓰겠죠.
측면을 강하게 하고 (더해서 개개인의 기술과 경합 능력이 뛰어나다면 더 좋겠죠.) 지금 발베르데가 그 어떤 감독보다도 많이 하고 있는 메시의 공간을 보장해주는 게 가능해지면 당연히 선수들의 스위칭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거고 경기 도중에 전술 변형도 잘 이뤄질 거임. 그렇다면? 메시는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까 이런 메시를 지원해줄 수 있는 선수들이 과거보다 더 많이 필요해졌다는 얘기입니다. 과거에는 왼쪽엔 멀쩡한 이니에스타 하나만 있으면 됐는데 이제는 이니에스타 한 명이 아니라 구성상 세 명이 있어야할 거고 오른쪽도 챠비, 알베스만 있으면 됐는데 이제는 그 두 명이 아니라 구성상 세네 명은 있어야할 거고.
제로톱을 사람들이 4-6-0 이라고 표현했던 건 전원이 미드필드화되서 패스가 늘어나고 자연스레 수적 우위를 가져가고 경합을 이겨서 어느 쪽으로든 발로 볼을 굴릴 수 있다면 그게 순간적으로 3열 전술이 될 수도 있고 4열 전술이 될 수도 있기 때문. 사람들이 많이들 말하는 4-3-1-2 가 될 수도 있고 4-4-2 가 될 수도 있고 4-1-4-1 이나 4-3-3 이 될 수도 있고 등등. 텐백이나 두 줄 수비에 파훼되서 망한 게 제로톱이라고 하던데 그 반대로 그런 전술들을 깨려고 발상의 전환으로 처음 등장했던 게 제로톱임. 공간을 만든다라는 개념을 상대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기 가장 좋은 전술이니까. 무링요는 이 제로톱이라는 전술을 수비적으로 영리하게 써먹어서 텐백이라는 틀을 기존보다 훨씬 짜임새있게 만들어낸 사람이고.
메시의 제로톱이 종말을 고했을 때 바르셀로나의 모습을 보면 메시의 폼이 기존에 비해서 내려왔다는 사실에만 사람들이 주목하던데 그 시즌 바르셀로나는 오히려 측면 퀄리티가 박살나서 (이니에스타를 제외한 전원이 하락세를 타고 있었고 네이마르는 그 시즌은 별로였으니까) 메시 의존증이 점점 올라가는 팀이었음. 당연히 제로톱이란 의미라는 게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중앙에 서있는 메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무엇을 할 때 최대한 루즈볼 탈환을 노리기 좋은 크로스라는 수단이 유독 돋보였을 뿐. 사실 타타가 아니라 어떤 감독이었어도 그 시즌 선수 구성에 그 선수들이 그 폼을 보여줬다면 어느 방향으로 경기를 풀어가라고 지시를 했어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같은 팀을 만났다면 똑같이 떨어졌을 거에요. 그 정도로 바르셀로나는 내려가고 있는 팀이었음.
늘상 말하지만 현대 축구라는 건 팀으로서의 유기적인 구조와 체력 리듬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스포츠입니다. 이게 잘 되는 중하위권 팀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내고 있는 시기에 흔히들 말하는 쓰나미를 굉장히 잘 내는 거고 돌풍을 일으키는 팀들도 보면 저 두 가지가 굉장히 잘 되어있습니다. 어차피 메시는 이제 영원히 측면 포워드로 못 갑니다. 가는 순간 몇 경기는 몰라도 시즌 전체로 보면 삐그덕 수준이 아니라 팀 자체가 붕괴될 거임. 수비적인 기여도 못하고 종횡으로 넓게 뛰지도 못해서 드리블도 길게 못하고 옛날처럼 90분 내내 최소 4명을 끌고 다니면서도 경합을 이겨내지도 못합니다. 근데도 메시는 여전히 제가 본 선수들 중 가장 잘해요. 네이마르, 그리즈만 둘 다 축구 잘하고 제가 생각하는 선수의 그림에 들어맞는 게 어느 정도 있어서 좋아하는데 이번 시즌만 놓고 봐도 메시가 훨씬 더 잘한다고 얘기할 수 있음.
헌데 당연히 메시가 이만큼 내려왔으면 메시 제로톱으로 간다는 의미는 메시 전성기를 기준으로 놓고 할 게 아니라 지금의 메시를 기준으로 놓고 하는 게 맞음. 물론 당연히 팀이 그런 틀과 구성이 갖춰진다하더라도 기복의 폭이 엄청 좁아지거나 경기력이 높은 수준으로 꾸준하게 이어지진 못하겠죠. 몇 명을 갖다 박아서 돌리든 일단 메시는 그 시절의 메시가 아니고 오른쪽에도 챠비, 알베스가 둘이서 하던 걸 그 이상으로 해낼 수 있는 선수들이 지금 없을 확률이 훨씬 높고 이니에스타나 네이마르가 혼자서 하던 걸 세 명이서도 버거워하고 있으니까. 허나 메시를 평생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면 이 팀은 메시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뛰기 편한 구성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봤을 때 보드진이 영입해오는 선수들이나 리스트만 봐도 100%는 아니지만 한 5~70%는 잘하고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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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메일로 다른 데서도 글을 쓰시냐고 여쭤보신 분이 계셨는데 제가 글쓰는 곳은 이 블로그랑 다음 바르셀로나 카페에 뜨문뜨문 올리는 것말고는 없어요. 다른 데서 저랑 비슷한 논조나 의견을 가지신 분들을 봤다면 제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음. 커뮤니티 활동해도 글 거의 안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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