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전술적 고집을 부리던 건 제 기억엔 딱 한번임. 바르셀로나 마지막 시즌.
뮌헨에선 첫 시즌은 너무 바꿔대다 자기 주관을 잃어버린 게 컸고 (마르티 페라르나우 책에도 나오고 그 외의 자리에서도 자기가 직접 바르셀로나 4년보다 뮌헨에서 6개월이 더 많은 시험을 했다 했죠.) 두 번째, 세 번째 시즌은 로베리가 필요할 때마다 없으니까 별에별 짓을 다 하다가 결국 마지막 시즌에 더글라스 코스타, 코망 무한 크로스를 승부수로 썼던 거고.
시티에선 선수단을 못 믿는 듯한 느낌의 전술전략을 썼던 챔스 리옹 전을 비롯해 계속 보강의 중요성을 외치다가 어느 정도 만족스러우니까 (또는 그 이상을 해줄 매물들이 보이지 않자) 고착화된 쪽에 가깝죠.
저 시즌은 세스크가 조금만 더 하면 궁극의 쓰리백이 완성될 것 같으니까 시즌 초반부터 선수들이 쓰러져 나가는 계산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썼음. 그 덕에 비야는 이미 9월부터 후반전에 터치 라인으로 쭉 빠져서 메시의 공간을 보장해주는 윙어 역할을 못하니까 효용성이 바닥이었고. (진작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는데 긴가민가하다가 이때쯤 확신이 생겼고 장기 부상으로 마침표를 찍었음. 수페르코파 감아차기가 부상 전 마지막 밥값 (골 멋있긴 함) 이고 티토 시절 밀란과의 16강 2차전이 부상 후 마지막 밥값임) 박스 근처에서 공간을 찾아 들어가야 밥값하는 페드로 역시 이 역할을 제대로 소화 못했음.
그래서 쓰기 시작하던 게 쿠엔카, 테요 같은 애들이고. 근데 둘 다 한계가 명확하게 보이던 선수들이었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고. 산체스는 기가 막힌 오프 더 볼과 경합 능력 (당시 마드리드 포백이 고생했을 정도) 이었지만 정작 넣어줘야할 때 못 넣어주면서 메시 의존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버린 원흉 중 하나였음.
이런 극단적인 전술 변형이 케이타의 쓰임새 저하까지 이어졌죠. 원래 펩의 전술적 변형의 핵심은 이니에스타의 위치 변화나 부재에 따른 케이타 투입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챠비가 템포를 확 죽여서 경기를 굳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메시 부재 시에 이니에스타를 메디아푼타로 세우는 4-4-2 변형 전술이었죠. (첫 시즌에 앙리-이니에스타-알베스를 활용해 메시 의존증을 줄이던 전술이기도 했음)
케이타가 횡패스, 백패스만 미친 듯이 해대서 저평가 되기도 하고 저도 패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긴 했습니다만 절대 무리한 선택을 안 하고 포지셔닝도 공격적으로 안 한다는 점에서 답답할 지라도 다 이긴 경기를 굳히거나 1대0, 2대0 상황에서 템포를 극단적으로 늦출 때는 매우 유용한 카드였죠.
근데 원정에서 상대가 뒷공간을 노골적으로 파는 게 먹히니까 원정 기복이 심해졌고 치고 박는 양상이 자주 나오니까 케이타의 효용성 마저 떨어진 거였죠.
쓰리백이 불안하기 때문이 아니라 체력 문제였기 때문에 펩이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음. 결국 시즌이 4월에 완전히 꺾여버렸는데 펩이 진작에 세스크 기용 빈도 수를 줄이고 전반기 엘클과 클럽 월드컵 3-7-0 은 그냥 어쩌다가 걸린 운이었을 뿐이라고 여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실패 요인 중 하나였다는 거.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측면이 고장난 거였지만 메시가 워낙 미친 시즌이었기에 충분히 가릴 수 있었음.
어떻게 보면 계속 한끗 차이로 안 되는 그게 제일 재밌긴 했는데 (개인적으로 재밌게 본 시즌 중 하나임) 또 다른 면을 보면 마지막이라고 선 그어놓고 안 된다는 게 결과로 보일 때까지 밀어부치는 모양새였죠.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펩이 아예 대놓고 쓰는 3-2-4-1 대형은 일단 바르셀로나 때도 그렇고 양 풀백 중 한 명만 공격적일 경우에는 계속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에 (칸셀로만 공격적이라 의존도가 생기거나 기용 방식이 경직되서 무너졌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죠.) 양 풀백 두 명이 매우 기술적이고 공격적이며 압도적인 체력을 갖출 수가 없다면 최대한 미드필드스러운 면모를 갖춘 센터백의 숫자를 확보한 이후에 대형을 자주 바꿔도 이질감 없이 적응할 수 있는 선수들을 최대한 갖춘 스쿼드를 만드는 게 첫 번째 목표였고 그걸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3-2 대형을 만들면서 2에 들어가는 선수들이 다 이런 변형에 익숙한 선수들이라는 거죠. 1피보테 역할도 소화할 수 있고 포백으로 전환 시에 일시적으로 센터백 위치까지 서거나 센터백 역할도 소화가 가능한 로드리, 유사 시에 후방 어디에서든 움직일 수 있고 상대의 압박을 이겨내거나 유도하면서 전체 대형을 끌어올릴 수 있는 베르나르도 실바, 풀백으로서도 뛸 수 있고 필요하면 센터백도 되고, 미드필드도 되고 윙어도 될 수 있는 워커, 리코 루이스 등등. 센터백들도 이제 변형에 다 익숙한 선수들밖에 없죠.
근데 문제는 이제 펩이 선수의 위치를 바꾸는 위치 변화를 활용한 경기 중 대응에 상대 팀들이 웬만해선 낚이지 않는다는 거겠죠. 라이프치히 전도 마레즈가 들어왔다 나갔다하고 베르나르도 실바의 위치가 계속 바뀌면서 상대의 대형을 깨려했으나 아예 낚이지를 않았다는 건데...
옛날 같았음 로드리가 왼쪽 미드필드로 있고 베르나르도 실바가 오른쪽 미드필드로 있는 것도 퍼스트 터치가 좋은 반대편 측면 포워드들에게 롱패스가 쏠쏠하게 들어갈 상황을 감안을 안 할 수가 없을 텐데 지금은 이런 게 아예 안 먹히고 있고 그만큼 시티는 분석을 많이 당했단 증거기도 하겠죠.
그럼에도 계속 쓰는 건 쓰리백-포백 호환이 잘 되고 1피보테, 2피보테를 오가는 게 잘 되기 때문이고. 그리고 미드필드가 순간적으로 8명이 될 수 있다는 점. 더해서 유사 시에 상대의 중앙 선수를 빠르게 둘러싸면서 압박할 수 있다는 거겠죠.
시티를 상대하는 팀들은 풀백이나 윙어가 매우 좋은 팀이 아닌 이상 무조건 중앙에서 한번 패스를 거쳐서 나가기 때문에 압박을 통해 그 패스의 방향을 고정시키거나 불확실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제일 뒤에 있는 센터백들 중 누군가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와서 대응하기 좋으니까요. 아칸지나 아케 등이 튀어나와서 막을 때가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네요.
여기에 전원 미드필드화를 이상적인 축구 중 하나라 여기는 토탈 풋볼의 관념상 펩이 현재로서 가장 선호할 수밖에 없는 변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듯 하고.
더해서 센터백으로부터 시작되는 빌드업이 매우 안정적이고 두 명의 피보테가 이들 앞에 서면서 좌우를 지원해주기 때문에 전체적인 대형이 상당히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 (양 풀백을 과감하게 전진시키거나 1피보테를 쓰거나 아니면 두 명의 풀백 또는 한 명의 풀백을 쓰리백 자리에 기용해 전진시키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아도 되니)
대신에 그만큼 많은 센터백, 미드필드들을 기용하고 중앙 투자를 하니 측면은 포워드 한 명이 책임져야하는 범위와 역할이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것과 최적의 판단을 내려 패스를 적재적소에 딱딱 할 수 있는 선수가 있냐 없냐에 따라 경기력의 편차가 매우 심하다는 두 번째 단점이 따라온다는 거겠죠.
더해서 이들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볼 터치는 이 다섯 명이 제일 많이 하는데 그래서 볼이 핵심적으로 나가는 지점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술적 중심이나 포워드들의 터치는 이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적은 편이거나 많지가 않음. 이게 세 번째 문제. 그러다 보니 적은 터치에서도 양 방향 패싱이 가능한 선수들이 좋든 싫든 제일 쓰임새가 클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귄도간을 대다수의 팬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도 그는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하는 선수임.
시티는 지금 패스 횟수나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원온원, 경합이 결코 적지 않으나 데 브라이너나 귄도간, 측면 포워드들의 패싱은 매 경기 적음.
전 저번 시티 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지금보다 더 리스크를 감수하고 직선적인 면을 갖춘 선수들을 그냥 직선적으로 쓰는 거 또한 답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왜 그러냐면 포든과 알바레즈를 측면 포워드로 쓰면 그 둘은 혼자 버려뒀을 때 가치가 확 떨어지며 그릴리쉬와 마레즈는 매 경기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못 가져오고 있음. 이건 기복이 있다는 뜻이죠.
직선적인 선수들이 단순히 크로스를 갈기고 대형을 넓게 만들어주고 상대 선수들을 때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장점만 있는 게 아니라 지배하는 경기 속에서 주변 동료들의 선택지를 늘려주고 좁은 공간에서 더 적극적인 공격이 나올 수 있기 때문. 그만큼 측면 포워드들이 애초에 더 안에서 뛸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센터백들은 굳이 두 명이 앞에 서지 않아도 충분히 변형 전술을 소화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아케는 왼발잡이라는 메리트도 있고 직선으로 확 튀어나가서 대응하는 면은 확실히 많이 성장했고. 아칸지는 왼발, 오른발 사용이 가능하고 오른쪽을 보면서 왼발을 쓰기도 해서 (반대의 경우도 있음) 상대의 압박에 잘 대응하는 편임.
근데 제가 봤을 때 펩은 그릴리쉬의 향상이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고 데 브라이너만 3-5월에 건강하고 포든, 알바레즈, 귄도간과 베르나르도 실바 등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모든 대회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거기다 에데르송이 지금보다 넓은 공간을 책임지게 될 경우를 생각한다면 쉽사리 바꾸기도 쉽진 않겠죠. 얘 이러다 일촌 패스 한번하면 난리날 듯 하기도 함..
거기다 라이프치히 전에 교체를 아예 안 쓰고 본머스 전에 라인업을 확 바꿔버리고 울브스 전 이후 처음으로 다섯 장의 교체 카드를 다 쓴 건 매우 계획적이라고 봅니다. 원래 펩은 토너먼트에서 홈 경기가 2차전이면 원정에서 늘 무승부를 베이스로 깔고 가는 사람임. 이기면 좋다는 마인드랄까요.
아마 스쿼드 전원의 리듬이 일정 수준 이상 올라왔다고 판단할만한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싶고. 16강 2차전 또는 8강에서의 경기력이 좋다면 전 이번 챔스는 기대해볼만 하다고 봅니다. 떨어지면 펩은 이번만큼은 시즌 계산을 철저하게 실패한 시즌이 되는 거겠죠. 전반기에 앞서나가지도 못했고. 결국 후반기 승부수를 본 게 무의미해지는 셈이니까요.
요번엔 펩의 승부수가 잘 먹혀서 시즌 잘 마무리했음 좋겠네요. 이제 챔스에서 사심 들어갈만한 팀은 얘네밖에 안 남았음... 글과 상관 없는 질문들은 Q&A 2 글을 이용해주세요. 편하게들 이용하시라고 계속 끌어올리는 거임.
Football/Writing